"21세기 벽두, 도래한 디플레이션 위기"
  홍기빈의 '현미경과 망원경' <24> 파국의 조짐과 '인플레이션 동맹'
  2004-08-11 오후 4:32:50
  IV. 다가오는 세계: 군사화, 인플레이션, 불황
  
  ① 지배적 자본 집단과 세계 경제의 위기
  
  앞에서 보았듯이, 21세기의 벽두는 1990년대를 풍미했던 '역사의 완성'과 지구화라는 낙관주의의 거품 너머 뒤숭숭하고 불길한 조짐들로 시작되었다. 그 불길한 조짐은 지배적 자본 집단의 차등화 축적 그리고 세계 자본주의 전체라는 두 가지 차원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차등화 축적 차원의 위기: 인수 합병 붐의 종언
  
  앞에서 보았듯이, 닛잔/비클러 이론의 핵심은 자본주의의 주된 추동력은 지배적 자본 집단(dominant capital)의 차등화 축적(differential accumulation)에 있다는 것이다①. 그리고 90년대에는 나스닥에서의 기술주와 금융 지구화, 신흥 시장(emerging market) 등장 등을 배경으로 지배적 자본 집단 간의 대규모 인수 합병이 차등화 축적의 주된 방식이 되는 '넓이 지향(breadth)' 축적 양식이 지배했다는 것이 닛잔/비클러의 주장이다. 그런데 1998년의 신흥 시장에서의 연쇄적인 금융 위기 그리고 2000년의 나스닥 기술주 폭락을 거치면서 인수 합병의 붐도 함께 수그러들게 되고, 이에 넓이 지향 축적 양식은 더 이상의 차등화 축적의 주된 방법으로서의 위치를 잃게 되었다.
  
  다음의 그림은 닛잔/비클러가 인수 합병의 추세를 살피기 위해 지표로 사용하는, '매입-건설 비율(buy-to-build ratio)'이다. 즉, 해당 기간의 인수 합병 거래액을 전체 고정 자본 형성으로 나눈 것이다.
  
[그림 1]  
 
인수 합병의 최절정이었던 1999년 214%에 달하던 그 비율은 2001년에 74%로 급격하게 줄어 들었다.

  여기서 닛잔/비클러가 차등화 축적 과정에 대해 힘주어 강조하는 논점을 기억해야 한다. 리카도 맬서스 등의 고전파 경제학이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서의 '이윤율 저하의 경향'같은 것은 경제 행위 주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본주의 경제 자체의 '운동 법칙'에서 필연적으로 발생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차등화 축적이란 그러한 논리적인 '운동 법칙'이 전혀 아니다. 다른 사업체들보다 더 높은 이윤율을 확보하려는 구체적인 '지배적 자본 집단'―따라서 다분히 논리적 추상체인 고전파 및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총자본(capital in general)' 개념과도 크게 다르다―의 갖가지 실천 전략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상 상태(stationary state)'나 공산주의 혁명이 도래할 그날까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리카도나 마르크스의 자본 '축적' 개념과 달리, 이 차등화 축적은 벌어질 수도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지배적 자본 집단이 자신들의 차등적 이윤율을 유지할 만한 책략이나 혁신 등에 실패하고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 이윤율이 평균보다 뒤쳐지게 되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며, 이 경우 차등화 축적(accumulation)이 아닌 차등적인 축적 감소(differential de-cumulation)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요컨대, 압도적인 힘과 크기를 가진 지배적 자본 집단이라고 해서 그들이 항상 차등화 축적을 이루게 해주는 보장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와 같이 21세기 벽두에서 인수 합병이라는 방식이 벽에 부딪혔다는 것은 곧 지배적 자본 집단의 차등화 축적 자체에 심각한 위기가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큰 덩치의 인수 합병을 통해 눈부신 속도로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고 주가의 상승을 가져올 수 있었던 대기업들이 이제는 꼼짝없이 '땀 흘려 생산해 정직하고 값싸게 내다파는', 미시경제학 교과서에나 나오는 맥 빠진 기업 활동을 해야 한단 말인가? 그런 활동으로 챙길 수 있는 이윤이라는 게 과연 얼마나 될까? 그렇게 '땀 흘리는 개미'들인 약방 주인 아저씨나 중소 생산업체하고 똑같은 이윤율로 만족하란 말인가?
  
  지배적 자본 집단에게는 이는 결코 참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자신들의 크기와 권력을 십분 이용하여 특권적인 이윤율을 확보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자본주의 세계 경제의 위기: 디플레이션의 위협
  
  1990년대 지구화의 또 하나의 귀결은 디플레이션의 위협이었다. 신흥 시장 그 중에서도 중국과 아시아 국가들의 급속한 산업화와 엄청난 생산 수출 물량은 세계 시장 가격 하락의 주요한 압력으로 작용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전 세계를 지배한 워싱턴 컨센서스의 보수적 금융 운영(financial orthodoxy)도 물가와 통화 가치가 상대적으로 안정된 가치를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이리하여 '주가는 오르고 고용은 늘어나면서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물가는 오르지 않는' 소위 '신경제(New Economy)'라는 관념이 유행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②.
  
  그런데 경제학 문헌에서 1940년대 이후 항상 경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인플레이션이었다. 1930년의 대공황의 디플레이션 사태는 1930년대 말의 유럽 정세가 세계 대전으로 접어들고 각국이 군비 지출을 늘리는 소위 '군사 케인즈주의(military Keyensianism)'를 시작하면서 곧바로 수습되었고, 1940년 케인즈의 저작 <군비 조달론(How to Pay for War?)>의 출판 이후 경제학자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악성 인플레이션을 막을 것인가에 맞추어져 왔던 것이다. 따라서 1990년대를 거쳐서 또한 이러한 디플레이션에 대해 걱정하는 소리는 처음에는 크게 들리지 않았었다. 하지만 1990년대의 말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디플레이션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기 시작한다.
  
[그림 2]  
 
1980년대 이후 디플레이션 언급 논문의 비율은 3%를 넘지 못하는 적은 숫자였으나 1998년에 그 숫자는 네 배 정도로 늘어난다.

  [그림 2]는 닛잔과 비클러가 이러한 공포의 확산을 검증하기 위해 작성한 흥미로운 시도이다. EBSCO의 Business Source Premier라는 데이타 베이스는 경제 경영 관련으로 영어로 된 2천8백개의 학술 저널 논문의 텍스트 검색이 가능하다. 텍스트 중에 인플레이션이 언급된 논문에 대한 디플레이션 언급 논문의 숫자의 비율을 매년 조사하여 그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림에서 뚜렷이 보이는 것처럼, 1980년대 이후 디플레이션 언급 논문의 비율은 3%를 넘지 못하는 적은 숫자였다. 그러다 아시아를 필두로 한 신흥 시장 국가들의 연쇄적인 금융 위기가 벌어진 1998년에 그 숫자는 네 배 정도로 늘어난다. 과잉 설비 투자와 과잉 생산의 위기가 세계 경제를 지배하게 되는 게 아니냐는 두려움이 공기 중을 떠돌기 시작한다. 그러한 분위기도 1999년과 2000년의 시장 활황으로 누그러지는 듯 보였으나, 주식 시장이 내려앉았다는 것이 분명해진 2001년부터 다시 그 숫자가 급증하여 2003년 초 4개월의 기간에는 16%까지 증가하였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와 공포는 비단 지배적 자본 집단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현재 세계 경제 특히 미국 경제 전체의 부채 비율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본다면 이러한 디플레이션이 경제 전체에 엄청난 파괴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공포를 피할 길이 없다.
  
  [그림 3]의 세 시계열들은 위부터 미국의 총 신용 시장 부채(공공 및 민간 부채), 선진국가들의 민간 부채, 개발도상국의 민간 부채가 각각의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나타낸 것이다. 먼저 시선을 잡는 것은 미국 경제의 총 부채 비율의 급증이다. 특히 1990년대 중반 이후의 미국의 공공 및 민간 부채 속도는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 시절 재정 적자 팽창기의 그것과 맞먹는 것이었다. 농산물 가격의 하락의 불꽃 점화로 전체 금융 시장이 주저앉아버렸던 1929년과 2002년 현재 미국 경제의 부채 규모를 비교해보면 등골이 오싹해지지 않을 수 없다. 후자는 전자의 두 배인 것이다! 대공황 직후 디플레이션으로 인해 명목 GDP가 감소하면서 1934년께에는 그 비율이 바로 160%에서 270%까지 올라간 바 있다. 만약 똑같은 정도의 디플레가 오늘날 벌어진다면 미국 경제의 부채-GDP 비율은 400%가 되고 말 것이다. 다른 선진국이나 개발도상국들의 상황도 크게 나을 것이 없다. 민간 부채만 가지고 1960년대 초와 비교해 보아도 전자는 3배, 후자는 4배로 그 비율이 급증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림 3]
1990년대 중반 이후의 미국의 공공 및 민간 부채 속도는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 시절 재정 적자 팽창기의 그것과 맞먹을 정도로 급증한다.

  미국의 언론 등은 그래서 중국의 '과잉 수출'을 이러한 디플레이션 압력의 주범으로 몰아붙이고 보호 무역주의로의 선회를 옹호하기도 한다. 이러한 공포의 확산을 반증하기라도 하듯 2002년 한 해 동안 <파이낸셜타임스>의 칼럼니스트에서 앨런 그린스펀에 이르기까지 틈만 나면 "디플레이션이 임박했다는 공포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로 시장을 안심시키려 했다. 누가 뭐라고 했는가. 필자도 이러한 이어지는 발언들이 오히려 그러한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는 것을 공공연히 확인시켜주는 미묘한 효과만 낳고 있다는 인상을 받은 바 있다.
  
  인플레이션을 기다리며
  
  앞에서 우리는 인수 합병의 '넓이 지향' 축적 양식과 함께 지배적 자본 집단의 차등화 축적을 달성할 수 있는 유력한 방법으로 경제 불황을 틈탄 가격 상승이라는 '깊이 지향' 축적 양식을 논의한 바 있다. 크기에 있어서나 사회적 영향력과 권력에 있어서나 압도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 지배적 자본 집단이다. 이들이 이러한 자신들의 차등적인 우위를 이용하는 것에는 인수 합병―고관대작 집안끼리의 '결혼'에 비유할 수 있다―도 있겠으나, 자신들의 독점력을 가격 결정력(pricing power)으로 전환시켜 계속 가격을 높여나가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 다른 기업들도 따라서 가격을 올리는 소위 인플레이션 악순환(inflationary spiral)이 시작되겠지만, 더 큰 독점력을 가진 이 지배적 자본 집단은 그 가격 인상 게임에서 항상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고, 이에 "평균을 능가하는(beating the average)" 차등적 이윤율의 자본 축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배적 자본이 이러한 가격 상승을 계속해 나가려면, 어느 몇몇 기업만의 가격 상승이 아닌, 경제 전체에 그러한 경쟁적 가격 상승이 하나의 규범(norm)으로 확산되는 것이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따라서 이미 기세가 꺾여버린 인수 합병 대신 가격 상승을 이용하여 차등적 자본 축적을 계속하려는 지배적 자본 집단에게 있어서 전체 경제에 인플레이션이 도래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희망 사항이 된다.
  
  지배적 자본 집단 이외의 각 경제 행위자들도 인플레이션을 간절히 원하게 된다. 엄청난 액수의 차입을 해온 기업들 및 금융 기관 그리고 미국 정부(!) 모두에게 있어서 디플레이션과 그로 인해 발생할 자신들 부채량의 폭증과 공황은 상상하기 싫은 악몽이기 때문이다.
  
  결국, 자본과 지배 세력 전반에 '인플레이션'이라는 단비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점점 넓게 펼쳐지고, 그러한 단비를 불러오기 위한 가지가지의 기우제같은 행사들―중앙 은행의 팽창 기조의 통화정책 등―을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진다. 즉, 지배적 자본 집단을 필두로 한 '인플레이션 동맹'이 지난 몇 년간 급격히 형성되어왔다는 것이 닛잔/비클러의 진단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두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첫째, 이 깊이 지향 축적 양식의 '인플레이션 동맹'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추 세력이 있다. 바로 우리가 오래 전에 살펴본 바 있는 군수 석유 자본 동맹(Petrodollar-Weapondollar Coalition)이다. 이들의 동향은 어떠한가.
  
  둘째, 과연 인플레이션이라는 것이 그렇게 현재 지배적 자본 집단과 경제 전체가 처해있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마법을 가지고 있는가. 분명히 대학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경제학 교과서에서도 또 밀턴 프리드만 이하의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들이 입을 모아 인플레이션이란 그저 '화폐적 현상'일뿐 '실제 경제'에는 아무런 충격도 가할 수 없다고 그러니까 다 쓸데없는 짓이라고 귀가 아프도록 가르치지 않았는가. 과연 인플레이션은 '마법'인가.
  
  한 가지 더. 인플레이션이 정말 그러한 '마법'이라면, 거기에 수반되는 비용은 무엇인가. 유럽의 마법사들은 신통력을 얻기 위해 악마와의 계약을 서슴지 않았고, 그 대가는 보통 일정 기간이 지난 뒤 그 영혼을 악마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마법사들도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또 다른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처음의 악마보다 더 큰 마력을 얻음으로서 그 영혼의 지불을 계속 회피해나가는 식의 계략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21세기 한국인들의 '카드 돌려막기'와 흡사한 이런 전술도 결국 그 말로가 좋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저 유명한 16세기 독일의 파우스트 박사 같은 이는 결국 온 몸이 갈가리 찢겨진 채로 발견되었다고들 한다. 인플레이션이라는 마법에 따르는 대가는 어떤 것들인가. 이 “인플레이션”의 문제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주(註)>
  
  ① 이 연재 1장 4절(책은 2장 4절)과 2장 2절(책은 3장 2절) 참조. 또 조나단 닛잔, 심숀 비클러 저, 홍기빈 옮김, <권력 자본론: 정치와 경제의 이분법을 넘어서>(삼인, 2004) 7장 참조.
  
  ② 곧 보게 되겠지만, 닛잔/비클러의 시각에서 보면 통념과는 달리 경제 성장은 본래 디플레이션적인 경향을 수반하게 되어 있는 것으로, 이 '신경제'라는 현상은 별로 이상하거나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홍기빈/국제 정치경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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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맥을 짚는 진단이군요   rux4yo..   2004-08-11 21:41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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