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자본축적과 지구정치경제의 향방
  홍기빈의 '현미경과 망원경' <9> III. 어제의 세계: 지구화, 인수 합병, 신자유주의 ①
  2003-06-16 오후 5:41:15
  III. 어제의 세계: 지구화, 인수 합병, 신자유주의
  
  ① 준비 운동1: 왜 “지구 정치 경제”인가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서 학교에서 또 공식적인 매체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세계 경제가 투명하고 평화적인 것일까라는 의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혹자는 중동의 에너지 위기와 군사 분쟁은 그 엄청난 숫자의 달러와 인명에도 불구하고 “일개” 사건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러한 “일화”를 근거로 하여 지구 정치 경제 전체의 성격에 대해 일반화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할 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 시야를 좀 더 큰 차원으로 돌려 그 지구 정치 경제의 “구조” 자체에 대해 이야기 해 볼 때가 된 것 같다. 이 3부에서는 지난 20년간 지구 위의 정치 경제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왔던 “지구화”라는 것이 무슨 의미였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 첫 순서로 이번과 다음 두 번에 걸쳐서 간단한 준비 운동을 해보도록 하자. 이번에는 우리의 인습적 사고 방식으로 굳어져 있는 국내/국제, 정치/경제의 이분법의 문제점을 알아보고 “지구 정치 경제”라는 대안적인 사고틀을 살펴본다. 다음에는 90년대의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특이성을 음미하기 위한 준비로, 19세기 이래의 세계 경제의 역사를 그 “지구 정치 경제”의 틀로 간단하게 재구성해본다. 딱딱하고 지루하더라도 이번 한번만 꾹 참아 주시기를.
  
  1. 두 개의 이분법: 정치와 경제의 분리, 국내와 국제의 분리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서 미국의 군수 – 석유 자본 동맹은 미국 국내의 정치와 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세계 정치와 경제의 구별에 전혀 구애됨 없이 그야말로 전방위적으로(universal) 조자룡 헌창을 휘두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현재의 대학에서 가르쳐지는 사회 과학의 상식과 통념에 익숙해있는 식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앞에서 닛잔/비클러의 인도를 따라 살펴보았던 이야기는 당혹스럽게 들릴 수도 있다. 분명히, 아직 우리가 대학에서 배우는 “공식적”인 사회 과학의 편제는 정치학과 경제학이 나누어져 있다. 그리고 정치학은 다시 각국의 국내 정치를 다루는 “비교 정치학”과 그 나라들의 외교 관계를 다루는 “국제 관계론”으로 나누어져 있다. 경제학도 거시 경제학에서 연구되는 “국민 경제”의 연구와 그 국민 경제들 간의 거래로 구성되는 “국제 경제”의 영역이 분리되어 있어서, 학과 조차 무역학과로 독립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런데 과연 이 국내/국제, 정치/경제를 분리시키는 두 개의 이분법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자연적인 진리일까? 서양 사회 사상사를 살펴보면 자연적인 진리이기는커녕 멀어봐야 200년 전인 19세기 초에야 비로소 생겨난 사고 방식이며, 그것이 정치학 국제 관계론 경제학 사회학식으로 칼같이 나누어진 학제의 제도로 굳어진 것은 불과 50년 남짓한 2차 대전 이후의 미국 대학이었음을 알게 된다. 18세기의 사회이론가들인 루소, 칸트의 저작에서는 당시 유럽 각국의 국내 정치 구조와 국제 체제의 성격을 완전히 동일한 선상에서 논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경제학도 그 원래 이름이었던 ‘정치 경제학(political economy)’이 암시하듯이, 18세기까지만해도 오로지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 행위의 하나로서 사고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19세기 산업 혁명의 여파로 유럽 사회 사상사에는 큰 변동이 생겨나게 된다. 산업화라는 미증유의 사태로 말미암은 그 당시의 급격한 사회 변동은 그 폭과 깊이에 있어서 실로 심대한 도전을 던지게 되었다. 기존에 사회에 대한 논의를 끌어 안던 신학, 윤리학, 기껏해야 정치학 법학 등의 당위적 수준에서의 틀로는 상황을 뚫는 데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하였다. 그 대안적인 접근으로 드디어 사회학을 필두로 하여 ‘과학’으로서의 ‘사회 과학’이 태어나게 된다. 프랑스의 오귀스뜨 꽁뜨(Auguste Comte) 이래 시작된 사회학의 모토는, 인간 세상을 ‘사회’를 하나의 독자적 작동 메카니즘을 갖는 ‘시스템’으로 가정하여 과학적 방법으로 그것을 연구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결국 ‘사회 과학’은 그 기원부터 주어진 사회를 하나 하나의 독립된 ‘시스템’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고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정치와 경제가 각각 독자의 메카니즘을 갖는 분리된 영역이라는 사고 방식도 19세기 초의 데이비드 리카도 토마스 맬서스 이전으로 거슬러 가기 힘들고, 무리를 한대봐야 18세기 중반 프랑스의 중농주의자(Physiocrats) 정도에 소급할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당대의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그러한 사고 방식을 대단히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도 물론이다. 산업화란 대규모 기계의 원활한 작동을 보장하기 위해 그 가장 기본적인 투입 요소인 사람, 자연, 화폐마저 상품으로 취급할 필요가 있었다. 즉, 칼 폴라니(Karl Polanyi)의 표현대로 ‘자기 조정 시장(self-regulating market)으로 전 경제를 조직하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시장은 ‘독자적’ 메카니즘을 가진 것으로 상정되었고, 리카도 이후의 경제학은 온통 그 ‘독자적’ 법칙의 발견을 목표로 발전해왔다고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서 현대 사회 과학의 또 평범한 식자들의 통념적 사고방식이 생겨난다. 즉, 인간 세계는 먼저 독자적인 작동 메카니즘이 내장된 독자적 단위인 ‘국가 사회’로 구성된다. 물론 그 사회들은 서로 관계를 맺지만 이는 당구공의 충돌과 같이 어디까지나 그 자신들의 메카니즘에 ‘외적인’ 것뿐이다. 또한, 그 사회 내부도 각각의 기능에 따라 정치, 경제 등등의 영역으로 구성되며, 그 하나하나의 영역은 또다시 독자적인 작동 메카니즘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정치’란 권력을 목표로 하여 인간들이 빚어내는 사회적 행동으로 구성되며, ‘경제’란 부를 목표로 하는 사회적 행동으로 구성되므로 서로 다른 종류의 합리성과 행동 원칙이 작동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세계는 국내/국제, 정치/경제로 갈라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미국 사회학의 거장 탈코트 파슨스(Talcott Parsons)의 이론에서 가장 체계적으로 제시되었다. 그런데 현대 사회 과학에 끼친 파슨스의 영향은 그의 저작과 이론을 통해서만 행사된 것이 아니었다. 2차 대전 후 벌어진 냉전 상황에서 미국 정부는 자신의 패권 하에 소위 ‘자유 진영’을 설계할 구체적 정책과 기술을 제공할 조직적인 연구의 제도와 방법론을 절실히 필요로 하였다. 따라서 기존에 비판적 지식인의 온상이 되어 반체제적 비판 이론을 쏟아내던 대학의 사회 과학 학과들을 그러한 ‘사회 공학’의 기술을 연구하는 틀로 전환시키는 작업에 착수하였는데, 그 작업의 한 가운데에 서있던 인물이 바로 파슨스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의 그러한 사회 이론에 입각하여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바 비교 정치학, 국제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인류학 등등으로 갈라진 학제가 나타나게 되었다. 물론 유럽의 대학에는 아직도 그러한 미국의 영향을 받지 않은 2차 대전 이전의 학제의 전통이 남아있으나, 미국 대학의 압도적인 세계적 지배력에 밀려 점차 동화되어 온 상황이라고 한다. 미국의 지적 식민지에 가까운 우리 나라의 상황은 더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2. 현실 세계로: 구조 변형과 자본 축적
  
  이러한 이분법은 분명히 혼란스러워 보이는 인간 세상을 깔끔하게 정리된 네 가지 종류의 이야기로 엮어내는 데에 큰 위력이 있다. 엉킬대로 엉킨 실타래를 꼭 다 풀어내야만 바느질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아무데나 필요한 길이만큼 잡아당겨 가위로 뚝 잘라내어도 예쁜 자수를 짓는 데에는 손색이 없다. 마찬가지다. 그 네 가지 영역 모두에 정통하고 나아가 그 연관 관계까지 이론화하여 현실 세계를 설명하는 것은 그야말로 그 엉킨 실타래를 모두 푸는 것 이상으로 피곤한 일이다. 그냥 불량식품 ‘뽑기’ 찍어내듯이 현실에다 그 국내, 국제, 정치, 경제라는 네 가지 영역의 틀을 찍어서 걸려드는 소재들만 가지고도 각각의 틀 안에서 깔끔하게 앞뒤 맞는 설명은 얼마든지 짜낼 수 있지 않은가.
  
  따지고 보면 19세기 이래 정치학 경제학 등등의 이론적 발전이라는 것도 그렇게 그 ‘하나의 틀’만 가지고도 훌륭하게 완결적인 설명을 지어내는 매뉴얼을 발전시켜 온 것에 다름 아니다. 되레 공연히 실타래를 풀어 본답시고 그 틀에서 벗어나 이리저리 현실을 헤매다가 그런 ‘깔끔한’ 설명에 실패하는 날엔 같은 학계의 동료들 스승들에게서 썰렁한 반응을 얻기 십상이다. 뭐 진리와 인류를 위해 희생당할 일 있는가. 괜히 잘못 덤벼들다간 칼 마르크스마냥 인생 파탄나고 패가망신하기 십상이다. 그냥 조용히 교수 자리 얻고 승진하고 학계의 존경을 얻으며 늙어가는데에 뭐하러 그런 거추장스런 “소잡는 칼”을 쓰겠는가. 그래서 세계의 대학에서는 그 “닭잡는 칼”로 조각한 “깔끔한” 설명이 오늘도 소복소복 쌓여만 간다.
  
  그러한 분리가 꼭 현실을 왜곡하라는 법도 없고 또 그렇게 해서 나온 연구들 전부가 무용지물이라는 것도 아니다. 단지 현실 세계에 살아가는 인간들이 고민하는 큰 질문들은 모조리 그 틀을 빠져나가기 쉽다는 것 뿐이다. 사회의 문제들은 대부분 그 실타래의 “꼬여있는” 부분에서 발생하고 있는데 그 부분은 그 네 가지 영역에서 “자신들의 연구 영역이 아니다”라고 서로 미루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논문들은 상아탑의 무궁한 발전과 교수 자격 취득자를 양산하는 것 이외에 그렇게 꼬여있는 문제들로 고민하는 현실의 사람들에게는 별 소용이 없을 때가 많다.
  
  인간 세계의 실타래가 왜 꼬이게 되는가 생각해보자. 인간 세상의 현실이 구성되는 데에는 오늘도 자연과 다른 인간과 교호하며 ‘삶’을 만들어가는 인간들의 행동과 관계 즉 아주 넓은 의미에서의 ‘생산’이 그 ‘씨줄’이 된다. 그런데 그러한 ‘씨줄’을 차지하여 뜻대로 조종하고 재구성하려드는 인간 집단이 또한 존재하는 바, 그들의 그러한 행동 즉 ‘지배’가 ‘날줄’이 되어 또한 사회를 구성한다. 인간 사회의 모든 역사는 그 씨줄과 날줄이 칭칭 엮이고 꼬이고 때로 풀리고 하는 이야기로 정리할 수도 있다. 이렇게 지배 집단들이 스스로의 권력을 공고화하고 확장하기 위해 벌이는 그 모든 행위, 또 거기에 양떼처럼 이리저리 몰리면서도 고단한 하루를 이어가려고 힘껏 살아가는 사람들이 벌이는 그 씨줄 날줄의 파노라마야말로 현실을 사는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데 그 이야기는 그 네 가지 영역 중 어디에서 다루게 되는가?
  
  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지배 집단’의 주업인 권력 확장은 결코 그 네 가지 영역 어디에 제한되어 계획되지도 실행되지도 않는 것이다. ‘신의 계획에 지옥 연옥 천상의 구별이 없’듯이, 이들의 계획과 전략에도 그 네 가지 영역은 구별되지 않는다. 가장 두드러진 두 가지의 예만 들어보자.
  
  1) 구조 변형(structural transformation)
  
  강대국등의 강력한 지배 집단들의 활동 덕분에 간헐적으로 벌어지는 사태 하나는 세계 체제의 구조 변형이다. 이렇게 기존의 세계의 구조 자체가 바뀌는 순간에 국내/국제 또 정치/경제라는 구별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안됐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야말로 지구적 규모에서의 구조 변형을 겪고 있는 혼란의 시기라고 수많은 이들이 지적하고 있지 않은가? 최근에 겪었던 공산권의 몰락과 아시아 금융 위기라는 두 가지 사례만 생각해보자. 이 두 사건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에 실로 근본적이고도 결정적인 충격과 영향을 던졌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사건은 왜 벌어졌는가? 누가 일으킨 것인가? 앞으로의 발전 전망은 어떠한가? 해결책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그 네 가지 영역 하나에 머무는 ‘전문가’들에게서 지금까지 교과서에 나오는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 이상의 속시원한 총체적 대답이 나온 적이 있던가?
  
  오늘도 세계는 어디론가 어지러운 속도로 바뀌어가고 있다. 그런데 그 방향을 알려주는 이는 적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불안하다.
  
  2) 자본 축적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자본 축적은 절대로 몇 몇 개인의 ‘경제적’ 행위 차원으로 머물지 않는다. 첫째, 권력의 축적이라는 것은 역사 이래 지배 집단의 주요 사업이었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특성은 그 권력의 축적이 거의 항상 자본의 축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둘째, 자본주의 경제는 전체 경제 공동체의 작동이 자본 투자의 정도에 의해 좌우되도록 맡겨놓은 체제이다. 그리고 그 자본 투자가 이루어지는 것은 ‘자본 축적’의 전망에 의해 거의 전적으로 결정된다. 셋째, 자본 축적은 ‘국경을 모른다’. 즉 국내/국제라는 틀은 자본 축적에 이용 가치가 있는 제도적 틀일 수는 있어도 그것을 가두는 틀은 되지 못한다. 즉, 자본주의 세계에서 자본 축적이라는 현상은 현실 세계 전체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심적 요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구화” 시대를 사는 우리는 매일 뉴스에서 곳곳의 빈곤, 재난, 전쟁과 내란의 소식을 듣는다. 다른 한 편 눈이 빙빙돌아 메스꺼울 정도의 숫자로 부가 축적되고 있는 소식을 또한 듣고 있다. 이렇게 미증유의 규모로 벌어지는 자본 축적과 그에 수반된 사회 변동을 보면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불안한 미래를 응시하면서 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그토록 중심적 현실인 이 “지구화” 시대의 자본 축적은 그 네 가지 중 어느 영역에서 연구되어야 할 주제인가?
  
  한반도 남쪽에 살고 있는 우리만큼 이 네 가지의 구별이 터무니 없이 느껴지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워싱턴, 평양, 여의도, 동교동이 복잡하게 엮여드는 대북 송금 특별 검사 수사는 국내적 사안인가 국제적 사안인가? “순수한” 경제 논리를 대변하는 셈인 무디스나 IMF의 발언에 따라 당장 청와대의 대북 대미 정책이 흔들려버리는 우리 나라에서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여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3. “지구 정치 경제”를 향하여
  
  이러한 학제 구분의 모순은 미국 학계에서도 자각되어, 1970년대 이후 국제 정치학의 일 분과로서 “국제 정치 경제(international political economy)”라는 학제가 탄생한 바 있다. 그러나 이것도 그 두 가지 이분법을 넘어섰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첫째, 정치와 경제의 연구를 통합한 것이 아니라, 두 영역의 독립을 전제한 상태에서 단지 “시장”의 운동과 “국가”의 행동을 “연결짓는” 선에서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그 “국제”라는 말이 암시하듯 아직도 국내 국제를 분리하여 후자에 치중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에 비판적인 일군의 연구자들은 그 대안적인 방법으로서 “지구” 정치 경제(global political economy)라는 접근법을 제안하여 그 두 가지 이분법을 좀 더 근본적으로 극복할 것을 시도하고 있다. 그렇게 그 네 가지 영역을 근본적으로 통합하는 방법으로 그 네 영역을 연결해주는 현실의 사회적 관계를 연구의 중심에 놓을 것을 제안하고 있다. 위에서 든 예로 말하자면 그 실타래의 엉킨 부분 즉, 지배와 생산이 벌어지고 있는 중심으로 바로 뛰어들어 그곳을 연구의 시작점으로 삼자는 제안이다.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학문적으로 정교하게 체계화된 방법론이 나오지는 못한 상태이지만, 그럼에도 현실 세계의 우리에게 유의미한 이야기들을 얻는 데에는 반드시 필요한 지혜를 담고 있다고 보인다. 우리가 이미 본 닛잔/비클러의 이론은 그 뛰어난 모범적 작업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이들이 이러한 방법론에 근거하여 80년대 이래 “지구화”의 이름으로 벌어진 신자유주의적 구조 변형과 인수 합병을 통한 자본 축적의 이야기를 그러면 곧 음미해 볼 것이다.
  
  추기
  
  이 연재에서 훌륭한 부분이 있다면 이는 전적으로 죠나단 닛잔(Jonathan Nitzan) 교수와 심숀 비클러(Shimshon Bichler)의 연구 성과로 돌려야 한다. 필자는 단지 그들의 연구를 소개하는 역할만 하고 있으며, 본문의 다양하고 깊이 있는 정보와 분석은 모두 그 두 사람의 성과물이다. 물론 소개하는 과정에서의 실수와 착오는 모두 필자의 몫이다. 그들의 연구 성과는 다음의 아카이브에서 원문으로 구해볼 수 있다.
  
  http://www.bnarchives.net
  
  참고할만한 닛잔, 비클러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Bringing capital accumulation back in: the weapondollar-petrodollar coalition-military contractors, oil companies and Middle East ‘energy conflicts’", Review of International Political Economy, 2(3), 1995.
  
  Ch. 5 “The Weapondollar-Petrodollar Coalition” in The Global Political Economy of Israel, (London: Pluto, 2002)
  
  * 필자 홍기빈씨는 정치토론 사이트 '시대소리(www.sidaesori.com)'의 고정 필진으로 활동중이다.
   
 
  홍기빈/국제정치경제 칼럼니스트
  이 기사 마음에 든다! 프레시안 마음에 든다!
  ARS 후원금 1,100원 휴대폰 후원금 1,100원 (부가세 포함)
  “작지만, 좋은 신문 하나 내 손으로 키우고 싶다”  
  월:(3개월-1만원),연 AB(1년-3만/5년-10만원), 평생회원(평생-30만원 이상)
 
 
 
 
  (0) (0)
 
 
 
  Best 클릭 기사
1. '극우 준동 역풍'에 한나라 지지율…
2. "지금 데모할 국민이 1천만, 맞아…
3. 정형근 '원희룡 맹성토', "술먹고…
4. 동아일보, 자사에 불리한 '여론조사…
5. "美, 유사시 북한에 핵 30개 투…
6. 박근혜-황장엽-조갑제, 한 자리서 …
7. 일본영화의 한국 2차상륙 시작되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산불
hari-hara의 '생물학 카페' <28> 산불 이야기
산불은 마치 블랙홀과 같아서 일단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면 그 끝은 파멸...
김태규 명리학 <170>
오즈의 마법사와 미국 대선
한국의 아르헨 차관설과 중국의 언...
  프레시안 PLUS
더불어숲학교
[제 18강] 김봉렬 (한국예술종합대학교 건축과 교수)의 <한국 건축의 자연관>
내 영혼의 자유로...
오카리나학교
유승엽 선생님과 함께 만들고 배우고 감상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
새 예술, 새 교육으로
가는 길
남북어린이어깨동무 이우학교
우리민족 서로돕기운동 더불어숲
  프레시안 MALL
인터넷 할인서점
박완서의 새 장편소설
[그 남자네 집] 베스트셀러
등극
자동차 보험 비교견적
절약올림픽으로 50% 아끼고, 순금메달5돈,주유권,상품권!! 참가만해도 바캉스용품 공짜!
신용평가 정보
본인의 신용정보 개인정보 이제 직접 관리하자!
부동산 정보
부동산 매물정보, 시세정보, 분양정보 한번에 해결하자
ⓒ 2001-2004 PRESSian. All rights reserved.    회원약관 | 저작권 정책 | 개인정보 보호정책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 거부
    프레시안의 모든 컨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으므로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